완도는 청정 바다와 섬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고장이지만, 이름조차 수많은 세월과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완도의 옛이름과 그 속에 담긴 문화적 상징, 오랜 섬의 역사와 흔적, 완도의 음식문화와 지금까지 어떤 가치를 이어오고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완도 옛이름과 문화적 상징
완도라는 이름이 정착하기 전, 이곳은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삼국시대에는 바닷길의 요충지 역할을 하며 ‘고금도(古今島)’라는 이름이 문헌에 등장합니다. 고금도는 ‘옛것과 지금이 공존하는 섬’이란 뜻으로 해석되며, 당시부터 중요한 해상 교통로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려와 조선 초기에는 ‘도서군’ 혹은 ‘청해진’이라는 지명이 쓰이기도 했습니다. ‘청해진’은 특히 장보고 대사가 해상 무역을 개척하며 본거지로 삼았던 곳을 일컫는 이름으로 유명합니다. 현재의 ‘완도’라는 지명은 조선 후기부터 점차 정착되기 시작했는데, ‘완(完)’자가 ‘완전함’, ‘온전함’을 뜻해 풍요롭고 평안한 섬이라는 상징을 담았습니다. 이런 이름의 변화는 단순히 행정 구역 명칭이 바뀐 것이 아니라, 시대마다 완도가 지닌 역할과 가치를 반영해온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완도의 옛이름 중 ‘청해진’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신라의 장보고가 9세기 초 이곳에 해상무역 기지를 세워 동아시아 바닷길을 연결했는데, 당시 청해진은 단순한 군사 거점이 아니라 선박과 물류, 문화가 오가는 국제 무역의 중심이었습니다. 장보고의 영향으로 완도는 ‘해양 왕국’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번성했고, 오늘날까지도 지역 문화의 자부심으로 남아 있습니다. 청해진 유적지에는 당시 무역로와 창고, 방어시설을 재현해 놓은 공간이 있어, 여행자들이 그 시절의 해양문화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장보고 축제나 청해진 축제에서는 완도의 옛 이름과 문화가 되살아나 현지 주민뿐 아니라 많은 방문객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이처럼 청해진은 완도의 해양문화와 정체성을 대변하는 이름으로, 지금까지도 고유한 상징성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부터 오늘날까지 쓰이는 ‘완도’라는 지명은 그 어감만으로도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게 합니다. ‘완(完)’에는 완전함, 온전함이란 뜻이 담겨 있어, 파도 높고 바람 거센 남해 바닷길에서도 지켜낸 평안한 터전이라는 상징이 깃들어 있습니다. 역사적 기록을 보면, 완도라는 명칭은 단순히 관리 행정 구역의 이름이 아니라, 섬에 사는 사람들이 바라는 이상향을 담은 말이기도 했습니다. 바다를 터전으로 삼아 거친 환경 속에서도 굳세게 살아온 주민들의 마음이 ‘완도’라는 이름에 고스란히 스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완도는 청정 해역과 풍요로운 수산 자원을 자랑하며, 관광지로서뿐 아니라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삶의 공간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완도의 이름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긴 세월 동안 사람과 바다의 이야기를 함께 담아온 상징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완도의 옛이름에는 바다와 섬, 사람들의 삶이 겹겹이 쌓인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름이 바뀌어도 그 속에 담긴 정체성과 문화의 향기는 여전히 소중합니다.
섬의 역사 흔적, 상세 보기
완도의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신라는 남해 해상을 장악하기 위해 고금도, 청해진 일대를 해상 방어 기지로 삼았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장보고 이전에도 남해 일대의 항구를 거점으로 삼은 기록이 종종 보이는데, 당시부터 이 지역은 교역과 국방을 아우르는 중요한 공간이었습니다. 고려에 들어서면서 완도의 전략적 가치는 더 높아졌습니다. 고려사에는 완도 인근의 군사 시설과 해상 교통로에 관한 언급이 여러 차례 등장하며, 몽골 침입 시기에는 이 일대가 수군의 전진기지로 사용됐습니다. 지금도 완도의 해안과 산기슭에는 돌로 쌓은 옛 방어 흔적과 봉수대 터가 남아 있습니다. 이들은 완도가 단순한 작은 섬이 아니라, 국가의 해양 방어선이자 문화 교류의 중계지였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증거입니다. 9세기 초 장보고가 청해진을 건설하면서 완도는 동아시아 해양 네트워크의 중심에 섰습니다. 청해진은 단순히 군사 기지가 아니라, 상업과 문화의 집결지로 성장했습니다. 완도의 청해진 유적지는 지금도 발굴과 복원이 계속되고 있으며, 당시의 성곽 터, 창고 흔적, 방어시설 일부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역사적 문헌에 따르면 장보고는 이곳에서 수백 척의 선단을 조직하고 당나라·일본과 교류를 이어갔으며, 이를 통해 완도가 ‘바다의 왕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청해진 축제와 유적 전시관에서는 당시 해상 문화와 상인 공동체의 생활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청해진의 흔적은 완도가 단순히 신화적 공간이 아니라, 실제로 역사의 한 장을 움직인 주역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까지 완도는 해조류 산업과 어업으로 경제적 활기를 이어갔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어선이 완도의 바다를 드나들며 자원을 수탈했고, 이에 맞서 지역 어민과 독립운동가들이 항일운동에 나섰습니다. 해방 후에는 미역과 다시마 양식이 본격화되면서 마을마다 공동 작업장이 생겨났습니다. 이때 완도의 어촌 공동체 문화가 독특하게 발전해 ‘해조류 왕국’이라는 별칭이 붙었습니다. 지금도 완도의 항구 곳곳에 남아 있는 옛 작업장과 창고, 선착장 구조물은 해양 산업의 역사적 흔적입니다. 근현대사의 흔적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지역민들이 역경 속에서도 바다와 함께 삶을 일궈온 산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식문화, 전통과 가치
완도의 전통음식은 무엇보다 바다가 준 자원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미역, 다시마, 전복, 멸치, 문어 등 완도의 해역에서 풍성하게 나는 해산물은 수백 년 동안 이 지역 사람들의 삶을 지탱해 왔습니다. 예부터 미역은 삶아 말려 저장하고, 다시마는 국물용과 조림에 두루 사용했습니다. 특히 미역국은 잔치와 생일, 산모의 회복식에 반드시 오를 만큼 중요한 음식이었고, 다시마와 멸치를 우린 육수는 완도 음식의 깊은 맛을 만들어내는 비결이었습니다. 전복죽이나 문어숙회 같은 별미는 귀한 손님 대접에 쓰이며 공동체의 정성과 예의를 담아냈습니다.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해산물과 이를 활용한 메뉴들은 바다의 순환과 어민의 삶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완도만의 음식문화를 보여줍니다. 완도의 음식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는 발효와 저장의 지혜입니다. 멸치젓, 까나리액젓은 완도 음식에 깊은 감칠맛을 더하는 핵심 조미료입니다. 바닷바람에 건조한 멸치를 곱게 갈아 절여 항아리에 숙성시키면, 계절 내내 김치부터 찌개, 무침에 이르기까지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젓갈은 완도 주민들에게 겨울철 식량이자, 집집마다 다른 맛과 손맛을 자랑하는 문화적 자산이었습니다. 해조류 역시 오랫동안 저장식으로 활용됐습니다. 미역과 다시마를 해풍에 말려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방식은, 자원이 부족했던 시절에도 안정적인 영양을 확보하는 중요한 방법이었습니다. 이런 발효와 저장식은 단순한 보존 기술이 아니라, 공동체의 결속과 생활의 지혜를 상징하는 문화로 이어져 왔습니다. 최근 완도의 전통음식은 건강식 트렌드와 만나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전복죽이나 다시마 샐러드, 멸치국수 등이 현대 식탁에 맞게 재해석되어 관광객과 젊은 세대에게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을에서는 전통방식으로 담근 젓갈과 해조류를 소중히 지키며, 가족과 이웃이 함께 음식을 나누는 문화가 살아 있습니다. 명절이나 제사, 마을 잔치 때면 전통 음식이 차려지고, 이를 통해 아이들은 어른들의 손맛과 마음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됩니다. 이런 풍경은 완도가 단순한 미식의 고장이 아니라, 세대를 이어온 공동체의 가치가 스며 있는 고장임을 증명합니다. 전통음식은 완도 사람들의 정체성과도 깊이 맞닿아 있으며, 그 가치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소중해질 것입니다. 완도의 역사는 바다와 함께 쌓여온 긴 시간의 기록입니다. 고대의 방어선에서 장보고의 청해진, 해조류 산업까지 이어지는 이 흔적들, 바다에서 온 풍요와 사람들의 정성이 만나 완성된 음식문화, 그리고 완도의 역사를 함께 기억하며 그 이름에 담긴 의미를 오래도록 지켜가길 바랍니다.